오랜만에 대학동기들을 만난 자리에서였다. 이 와인을 처음 접한 것은. 왁자지껄 녀석들과의 즐거운 수다가 최고의 안주였으며 그 안주가 지나치게 강한 맛이었던 지라 이 와인의 맛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라고 면피성 발언을 하고 싶지만, 기실은 이미 취기가 살짝 오르도록 사케를 마신 전작이 있었기에 안 그래도 무딘 혀가 더 무뎌진 탓일게다. -_-;
붉은 자주빛의 빛깔은 균질하게 좋았고, 바디감이나 탄닌이 강하지 않았던 기억이라 친구들과의 부담없는 만남에 더 잘 어울릴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덕인지 끝 맛의 여운이 호기심을 자극하며 끝까지 맴 돈다기보다는 친구들과의 가벼운 수다와도 같이 곱씹을 여운없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던지라 격를 갖춰야 할 묵직한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내겐 (사케와의 시너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편하게 즐길 수 있을 즐거운 와인이 되어 줄 듯 하다.
아래는 본 와인의 홈페이지에서 와인정보를 캡춰한 것.
얄룸바는 새로운 삶을 찾아 남호주 Barossa Valley로 이주한 영국인 양조자인 Samuel Smith 가족에 의해1849년 설립되었다. Angaston 근처에 12 ha의 땅을 구입한 그는 아들과 함께 원래 자라던 식물들을 모두 제거하고달빛 아래에서 첫 포도 나무를 심고 그 땅을 Yalumba라 이름 지었는데 이는 “이 모든 땅”이라는 의미의 토착어 이다.
6세대, 15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얄룸바는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소유 와이너리로서 그들의 지역을 가장 잘 반영하는 와인을 만듦으로 오늘날 호주 와인 산업의 성공 스토리를 실현해가고 있다.
얄룸바는 양조에 사용되는 오크통을 자체 제작하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와이너리로 오크통에 대한 깊은 이해와 축적된 노하우는이들 와인 전반에 걸쳐 빼어난 품질로 확인되며, 특히 최고 와인인 옥타비우스(Octavius)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90L오크통에서 정밀하게 숙성된 놀라운 와인으로 명성이 높다.
또한 포도나무 종묘장까지 갖추고 있어 다양한 품종과 클론(동일품종으로 다른 유전적 특징을 갖는 개체)의 실험 재배를 거쳐우수한 묘목을 상용화하고 있는데, 특히 비오니에(Viognier) 품종을 호주에 최초로 정착시킨 것은 대단한 업적은 평가 받고있으며, 이들이 쉬라즈-비오니에 블렌드와 100% 비오니에, 그레나슈 와인에서 그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지역적 특색과 고유한 개성을 담은 얄룸바의 와인들은 쉬라즈, 카버네 소비뇽, 샤도네이 등의 메인 품종과 그레나슈, 리슬링,비오니에 등의 특화 품종에 있어서 남호주 각처에서 최고 품질로 재배된 포도들을 이용해 만들어지며 그 탁월함은 150여년의역사에서 확인되었다.
♥ 홈페이지 : www.yalumba.com ♥ 소유주 : Robert Hill Smith
♥ 와인메이커 : Brian Walsh, Alan Hoey ♥ 소유 포도밭 면적 : 1,234 ha
♥ 재배 포도품종 : Cabernet Sauvignon, Chardonnay, Grenache, Riesling, Vignier
지난 일요일 분당에 약속이 있어 간 길에 저녁이라도 먹을 겸 집에 들렀더니, 이젠 제법 제 힘으로 걸으려 한다. 물론 아직은 온전히 혼자 힘으로 걷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앉아서 놀다가 지겨워 베란다라도 나가고 싶으면 주변에 낚이는 어른의 손가락을 슬며시 잡고선 한걸음 앞장서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애들은 정말 하루가 다르게 크는구나 싶어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덕에 현관에서 그간에는 보이지 않던 윤서의 신발까지 놓여 있는 것을 보니, 우리 가족이 확실히 한 명 늘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감정이 불쑥 솟기도.
게다, 의사표현이 적극적이고 호불호가 확실해졌으며, 표현할 수 있는 단어도 늘었다. 한시간 좀 넘게 분당에 머문 동안 윤서가 내게 들려준 단어는 다음과 같다.
엄~마
아~빠!
무~울(물)
밥빠!(밥)
까까
껓(꽃)
어머니께서 며칠전 데리고 나가 걸음마를 시키면서 꽃을 보여주셨더니, 베란다에 핀 난꽃을 보며 '껓'을 외치며 그리 좋아하더라고. 어째 내가 갔을 때 어렵사리 핀 난꽃이 덜렁 한송이만 남아 있더라니 요 녀석이 죄다 뜯어 놓았단다. 그나마 남은 한 송이도 나와 베란다에서 놀다... -_-a
생~&@!
이 단어, '생쥐'다. 집에 갔더니 <생쥐와 코끼리>라는 책이 있길래 읽어주다 윤서가 손가락으로 생쥐그림을 가리키길래 '생쥐'라고 일러줬더니 차마 '쥐'까지는 힘들었나 보다;
윤서가 늘 하얀 도화지처럼 순수하게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자신만의 공간에 제 스스로 보고 듣고 깨우친 것을 그려두고, 또 엄마와 아빠를 비롯한 주변의 어른들이 얘기하는 것을 귀담아 적어두고 있었구나 하는 것에까지 생각이 미치니 아이가 현명하게 자기 중심을 굳건히 세울 수 있도록 훌륭한 조력자의 역할을 해줘야 겠다는 일종의 책임감이 생긴다.
그러고 보면 Greatest love of all의 가사는 언제 되씹어 봐도 좋은 가사이다.
I believe the children are our future
Teach them well
And let them lead the way
Show them all the beauty
They possess inside
Give them a sense of pride
근래 들어서는 이런 류의 헐리웃 블록버스터에는 흥미를 상실한게 분명하다. 미국 개봉 첫 주, 70만불이 넘는 오프닝 성적을 기록하며 초대박 흥행을 예고했다는 소식에도 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은 그다지 미동하지 않았다.
헌데, 동행을 제안한 후배의 연락과 분노의 질주와 트리플 엑스를 거쳐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오마쥬와도 같은 패시파이어에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흥행질주를 거듭했던 빈 디젤이 바빌론 A.D.같은 말아먹은 영화 출연 후 기세를 못 피다 몇 년만에 가뿐히 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여 미동되지 않는 호기심에 양해를 구하였다.
예상했듯 영화적 구성이나 스토리는 단선적이며 허점이 보이기까지 하지만, 관객들이 기대할 속도감으로 상영시간을 모두 채워주고있다. 특히 자동차에 오타쿠적인 감성을 지닌 사람에게 이 영화는 트랜스포머 못지 않은 박진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내겐 역시 허술한 느낌. 조금은 더 길게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던 미쉘 로드리게즈의 등장 이후로는 아우토반에서 경부고속도로로 옮겨 달렸다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빈 디젤이 여성과 함께 있으면 나오곤 했던 배경음악에서는 난 왠지 멜로가 아닌 에로의 냄새가 -_-a
그래도 빈 디젤의 오랜만의 흥행소식은 반가운 것임에 분명하고, 이 영화는 복잡한 생각없이 속도전을 즐기고 싶은 관객의 욕구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성실했을 뿐이다. 아우슈비츠에서 감시관으로 일했을 때마저.
그녀는 자신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지지 않을 범위내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자기방어가 다른 사람의 형벌까지 뒤집어쓰는 것이었더라도.
그리고 그녀는 솔직했을 뿐이다. 그녀는 글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숨겼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순수했다. 소년은 그녀가 나치의 전범이 된 것이 안타깝고 그녀에 대한 사랑과 사회적으로 용서받기 어려운 그녀의 죄 사이에 갈등을 했을지언정, 그녀의 소년에 대한 마음은 사랑이었을 뿐이다. 그녀는 소년과 그녀와의 소통에 사랑이외의 이질적인 감정은 개입되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출소전 소년과의 만남이후 그녀가 선택한 결정은 변질된 사랑에 대한 애닯은 순애보였는지도 모른다.
소년은 순수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기 전까지 소년은 그녀와 완벽한 합치를 보여줬다. 그러나, 소년이 그녀의 세계(그녀는 버스 차장으로 일할 때도, 그리고 전범으로 교도소에 있을 때도 그녀가 기거하는 방이 세상의 전부이지 않았을까?)에서 벗어난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소년이 그녀와 같이 순수하게 남아 있을 수 있으리라는 것은 거짓된 믿음일 것이다. 소년은 순수할 수 없었기에 평생 그녀의 그림자에 갇혀 갈등을 하면서도 정작 그녀에게 손을 뻗지는 못한다.
무지하였기에 더 수월할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단순했다. 하여 그녀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단선적으로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소년은 사랑이라는 감정에만 집중하기에는 너무 복잡했다. 따라서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그녀와 소년사이에 더이상 이질감이 없는 감성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음을 알고 결정된 것이라 생각되기에, 그것이 내게는 안타깝지도 갑작스럽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그녀와 소년의 순수했던 추억을 지키려는 또 하나의 자기방어였을지도 모르겠다.
케이트 윈슬렛, 그녀가 나이들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움이다. 더불어 깊어지는 연기력을 볼 수 있기에.
랄프 파인즈, 그의 눈빛은 역시 호소력이 있다.
데이비드 크로스, 케이트 윈슬렛에게 밀리지 않는 내공이 있다. 아직 젊은 독일 배우이던데 앞으로 지켜볼만한 친구일 듯.
DVD를 살 때도 이 영화에 대해 내가 사전에 확보했던 정보는 그다지 없었다. 그저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라는 것 밖에는. 그러나, 원작에 대한 호평과 클래식이 소재가 된 만화라는 점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었기에 주저없이 주문을 하였다.
원작을 보지 못 했기에 영화와 원작과의 싱크로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가늠할 길은 없으니 원작 대비 호불호는 내가 감히 언급할 사항은 아니고, 영화 자체로만 본다면 감성을 깨우기에 충분한 영화이다. 어찌보면 아이들의 눈 높이에 맞추어, 겸허한 모짜르트와 천재를 질투하지만 시기어린 음해는 하지 않는 순수한 살리에르의 만남이라고 할까?
유명한 피아니스트를 아버지로 둔, 그리하여 어렸을 때 부터 정통 피아노 교육을 받은 슈헤이는 잠시 전학간 학교에서 카이라는 소년을 만나게 된다. 카이는 잡초처럼 자란 소년이지만 피아노에 대한 천재적인 감성과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피아노를 치는 이유는 즐거워서이다. 그런 카이의 천부적 재능에서 슈헤이는 가슴이 울리는 감동과 동시에 묘한 질투심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어린아이답게 그 질투는 건강한 경쟁심으로 상변화되어 콩쿨에서 경합을 하게 되는데...
피아노를 매개로 두 아이의 건강한 경쟁을 풀어가는 이 영화는 롤러코스터식의 감정 기복은 없다. 그 흐름이 지극히 평이하며 일상적이기에 단선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위험을 어린아이라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법한 판타지적 요소를 중간중간에 삽입함으로써 피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내 귀가 정밀하지 못하고 노트북을 TV에 연결해서 보는 조악한 감상환경 탓이겠지만, 카이의 연주가 폐부를 찌를만큼 감동적인 울림으로 다가와야 할 장면에서 난 정작 별다른 영혼의 미동이 없었다는 것. 그러나, 때묻은 일상에서 벗어나 유년기의 정갈한 감성을 되살리기에는 전혀 아쉬움이 없는 영화였다.
온 국민의 관심이 WBC에 쏠려 있던 주말, 제겐 이 외에 멕시코에도 촛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LPGA 마스터 클래식 투어가 진행되고 있었고, 바로 이 대회에서 박지은이 2라운드까지 실로 오래만에 Top 10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입죠. 1라운드에서 3언더파를 기록하여 1위와 4타차인 공동 6위를 기록중이였기에 2라운드 성적에 따라서 우승도 살짝 노려볼 수 있겠다 싶어,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일요일 새벽이었습죠... LPGA 홈페이지의 실시간 스코어링 현황을 부여잡고 2라운드 결과를 봤었습니다.
결과는 좀 아쉽기는 했지만, 1언더파를 추가하여 공동 7위. 선두와는 3타차가 나기에 마지막인 3 라운드에서의 선전에 따라 역시 우승이 가시권이었습죠. 하여, 오늘 새벽에도 열혈 응원을 해볼까 했으나 출근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김인식 감독의 믿음의 야구를 추종하여 박지은 선수를 믿고 잠들곤... 결과를 확인하니, 최종 라운드에서 3오버파를 기록하여 최종 1언더파. 공동 12위로 본 대회를 마감했더군요. 아쉬운...
그래도, 올 시즌 박지은 선수가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살짝 해봅니다. 실제 경기 중계를 보지는 못한지라 전성기때의 샷을 얼마나 회복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올해 2개 대회에 출전하여 32위 -> 12위로 순위를 끌어올린 모습을 보인데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더블보기를 8,9,11홀에서 3개나 범했으나 크게 무너지지 않고, 그래도 3오버파로 막아내는 나름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준 것을 고려하면 말입죠.
박지은 선수, 부디 올해는 4년여를 끌어온 슬럼프를 떨치고 다시 메이저 퀸으로 우뚝 설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꽤 오래된 옛 일이지만, 아직도 귀는 생생하다. 알 자로(Al Jarreau)의 감칠맛 나는 음성... We'll walk by night, We'll fly by day. moonlighiting strangers Who just met on the way~
브루스 윌리스의 발견이었던, 그리고 브루스 윌리스와 시빌 쉐퍼드의 티격태격 탐정기였던 블루문 특급(Moonlighting)은 이렇게 알 자로옹의 목소리와 함께 시작되었었다. 지금은 대스타가 된 브루스 윌리스와 헐리웃 샴푸의 요정이라 할 수 있었던 시빌 쉐퍼드의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내가 이 시리즈를 보면서 가장 두근거렸던 순간은 바로 알 자로가 노래한, 드라마 제목과 동명인 Moonligthing과 함께 시작하는 오프닝이었다.
그렇게 두근거렸던 곡이었으나 알 자로의 정규음반에는 어디에도 수록되지 않아, 늘 향수로만 간직되던 곡이었기에 국내에선 품절되었었던 이 드라마의 OST를 구하는 것이 한 때는 과업처럼 느껴지던 때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바라던 곡이 수록된 OST를 재작년이었던가... 향뮤직에서 발견한 기쁨은 하여 매우 달콤한 것이었다. 그리고, 알 자로의 음성 뿐만 아니라 기억에서 퇴화되었던 브루스 윌리스와 시빌 쉐퍼드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의미 깊었던 발견이었으며, 더불어 Chubby Checker나 Linda Ronstadt, Billie Holiday의 음성까지 같이 있으니 마치 어릴 적 과자종합선물세트를 뜯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할까?
모델일을 하다 엉겁결에 탐정 사무소를 맡게 된 메디(시빌 쉐퍼드)와 뜬금없는 듣보잡 탐정인 데이빗(브루스 윌리스, 이 시리즈에
캐스팅 되기전까진 실제 그의 존재감도 그러했던)의 심드렁하면서도 경쾌한 연애담이 후식처럼 가미되며 때로는 느와르적이기까지 했던
그들의 탐정놀이가 주는 드라마적 재미가 훌륭했음은 물론이었고, 간혹 흑백으로 처리가 되거나 뮤지컬 형식이 차용된 에피소드가 등장했던 기억과 시리즈를 종결하는 에피소드가 촬영 세트장이 등장하면서 스텝과 배우들이 이제 더 이상 촬영을 하지 않겠다며 투덜거리며 끝나던 결말 등은, 당시 내겐 일종의 형식의 파괴였던 동시에 Moonlighting을 애청했던 가장 큰 이유였던 참신함이었다.
아직도 휘엉청 뜬 밝은 달을 보면 가끔씩 생각나는 드라마 Moonlighting. 난 그럴때 마다 알 자로를 듣곤한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꽤 오래 전에 본 영화이다. 시간적 간극이 있음에도 이 영화를 언급하게 된 것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것이 반가운 탓이다. 사실, 아카데미 시상식 발표가 있은 직후 쓰려고 했지만 이런저런 비겁한 변명들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지금까지 왔고, 그럼에도 굳이 이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다짐만 하고 수행은 하지 못할 나의 지리멸렬함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누군들 그렇겠지만, 난 죽음에 약하다.
그것은 할머니의 죽음에 기인한다는 것이 스스로의 분석이다. 그렇다고 할머니 생전에 내가 아주 애틋한 관계를 형성했던 것은 아니었다. 되려 할머니와의 관계는 서울과 부산이라는 먼 거리를 구실로 명절에나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밋밋한 관계였었다. 게다 할머니께서는 내가 초등학교시절 이미 여든을 넘기신 고령이신지라 원활한 의사소통에는 약간의 제약이 있었다.
그러했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군 복부 시절 받았다. 이미 입대 초기에 외할머니의 부고를 경험했던지라 급하게 휴가를 상신하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에서도, 그리고 조문을 오신 친지분들을 모셨던 장례식장에서도 큰 동요없이 담담하게 할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때까진 말이다.
헌데, 할머니께서는 화장을 하시었다. 몇 분의 반대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나, 아버지께서 어린 시절 이미 돌아가셨던 할아버지께서 화장을 하셨기에 같이 화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었나 보다.
처음 봤던 화장터의 풍경. 난 그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순진함이었다. 죽음을 다루는 곳. 난 그런 곳은 고결하고 경견할 것이라는 막연한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봤던 그 곳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차가운 공장. 이것이 내가 화장터를 처음 본 순간 가졌던 느낌이었다. 그리고 고인과 좀 더 함께 하고 싶은 유족들에게 돈을 받고서야 화구에 관을 넣는 것을 잠시 지체해주던 계산된 손길과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린 육신. 이런 것들이 융합되어 난 까닭모를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왠지 죽음을 여유롭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잃게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이런 내게 염습과 납관을 다뤘다는 굿'바이는 어딘지 모르게 나를 달래줄 수 있을 것 같은 영화라는 생각이었다.
주인공인 다이고와 가까웠던 영화 마지막의 두 분의 죽음을 제외하면, 이 영화 속에서의 죽음은 무겁게 가라앉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되려 어떤 부분에서는 유쾌하기 까지 하다. 그러나, 교향악단 단원에서 납관전문회사의 직원으로 엉겁결에 밥벌이를 바꾼 다이고와 그 사장이 亡者를 대하는 방식에는 늘 亡者에 대한 존중이 깔려 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다루는 죽음은 여유롭게 보이면서도 결코 경박스럽지 않다. 조금은 궁금했던 영화제목 굿'바이에서의 한 박자 쉬어가는 듯한 '의 존재는 이와 같은 것들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면에서 난 이 영화의 우리말 제목이 꽤 마음에 든다.-
그리고 교향악단의 첼로 연주자에서 염습을 하게 되는 다이고의 직업적 변화가 처음에는 이질적으로 느껴지지만, 음악이 살아 있는 자의 영혼을 달래주듯, 염습이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그 이질감은 융해되고 만다. 다이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본인 스스로도 처음에는 꺼렸던 그의 일을 결국에는 스스로 존중하기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굿'바이. 이 영화는 내게 죽음 앞에 한 박자 쉴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주는 동시에, -최소한 내겐-산 자의 영혼도 달래주는 영혼 치유적 영화였던 것이다.